한달 전 공연의 기억을 이제야 부랴부랴 끄집어내는 까닭은, 오늘 슬립노모어를 또 보고나면 잊어버릴 게 불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이미 많이 날아갔지만(아아 귀찮음이여) 이제라도 몇 자 적어본다.
비가 엄청나게 많이 왔던 날인지라, 미끄럼 사고가 있을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내가 다니는 구간에는 별 일 없었다. 나도 넘어지고 싶지 않았고, 남이 다치는 광경도 마주하기는 싫었기에 이 부분은 정말 다행. 근데 입구에 발매트 같은 게 있으면 좋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고.
지난 1회차 관람을 하면서 느낀 것을 토대로 이번 관람 전 다짐한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우선 1. 이번에는 꼭대기층 병원 위주로 관람한다 2. 여성과 남성 중 택해야하는 상황에서는 여성을 고른다 3. 위층과 아래층을 택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위층을 고른다 정도로 방향을 정하고 옴. 저번에는 보고 싶은 걸 다 보려는 마음이 앞서서 우왕좌왕했다는 아쉬움이 남았기에. 2번과 3번을 정하고 간 것은 꽤 도움이 많이 되었다. 덕분에 장면이 끝나고 이동하면서 분리구간을 맞닥뜨렸을 때 고민 없이 발걸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다음에 본다면(아니 먼 일처럼 얘기하지만 사실 오늘이잖슴) 비슷하게 정하고 가는 걸로.
앞서 말했듯 이번 관람에서는 병원을 중점적으로 보기로 했다. 병원을 빙빙 돌았던 길치 친구가 무시무시한 분위기에 대한 묘사를 해주었지만(참고로 난 창조 공포에 능한 엄청난 공찔이이다) 궁금한 건 못참아~ 그래서 입장 하자마자 맨 위층까지 뛰어올라갔다. 6층이라는 걸 알고 올라갔지만 나선형 계단을 반복해서 빙글빙글 오르다보니 지금 여기가 몇 층 쯤인지 헛갈리더라.
첫 루프부터 6층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10명 내외로 매우 적었다. 초반에는 아무 일도 없다고 들었기에, 방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공간의 구조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이윽고 간호사 두명이 몇 명의 추종자(=관객)와 함께 병실로 들어왔고 여기부터 간호사만 따라다녔다. 간호사즈는 보통은 병원 여기저기를 같이 다녔지만 분리 구간이 두 개 있었는데 이동하지 않고 남는 쪽+사람이 적은 쪽으로 선택했다. 그 과정에서 맥베스 부인 목욕 장면을 제대로 못봐서 조금은 아쉬웠음. 역시 멕베스 서사는 관객이 많다. 그만큼 매력적이시란 말씀이지.
확실히 병원은 아래층과 다른 분위기였다. 듣던 것과 다르게 무서운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무서움보다는 외로움 쪽이었달까. 영화관 공간을 그대로 활용한 언덕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1층과 2층의 간격을 두고 멀리서 마주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2층에 올라서 1층에 있는 맥베스 부인을 내려다보는 순간은 다른 의미로 영화같았다. 그리고 5층 오두막에서 간호사와 일대일이 있더라. 차를 마시면서 동화같은 얘기를 듣는 건데, 겪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아냐하면 엿들었으니까...? 보통 일대일은 방에 들어가기 마련인데 이건 오두막의 나무판자 틈으로 엿볼 수 있어서 어쩐지 굉장한 변태가(...) 된 기분이었다. 대충 얘기는 훔쳐들었지만 잔에 따라주는 차가 무슨 맛인지 궁금했다.
마음에 여유를 갖고 충분히 공간을 느끼며 돌아다닌 관극이었다. 마지막 만찬을 보고나서야 알아차렸는데 두 루프동안 병원에서만 있었던 모양이다. 첫 만찬으로 생각했던 게 알고보니 두 번째였음. 손목시계를 차고 가면 시간 관리에 도움이 될 거 같다. 난 귀찮음과 자연스러움을 지향해서 다음에도 안 차고 오겠지만...
병원을 충분히 둘러본 뒤 내려가도 되겠다는 생각에 내려왔는데 우연히 일대일의 기회가 있었다. 사람 많은 쪽보다는 사람 적은 쪽으로 간다는 기준이 있었기에 비교적 한산한 분위기의 4층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행운을 얻었다. 그동안 내가 아가씨라고 부르던 역할이었다. 저번에 본 배우와 다른 분이라서 그 역할이 맞나 긴가민가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 손을 잡고 방에 들어감ㅇ0ㅇ 내 마스크를 벗기고 엄청 슬픈 표정으로 날 한참동안 보다가(하마터면 고백할뻔) 목에 걸고 있던 펜던트를 내 목에 걸어주고는 옷장 안에 같이 들어가서 들릴듯 말듯 은밀하게 얘기를 시작하는데
맙소사 영어였다. 제이크야 영어 공부 안하고 뭐했니... (이 말을 저번 후기에도 본 거 같다면 정답입니다) 영어듣기 하는 기분으로 귀 쫑긋 세우고 들었다. 자기는 맨덜리에 살다가 우연히 슈퍼내추럴한 힘에 휘말려서 이 공간에 오게 됐다 여기는 어딘지 모르겠다 집으로 너무 돌아가고 싶다 너는 꼭 너가 사는 곳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굿럭 하면서 벽을 미니까 옆방이랑 이어져있는 구조더라. 아가씨가 나를 지긋이 밀었고 나만 옆방으로 튕겨져 나왔다. 진짜 뭐에 홀린 기분이었다. 펜던트라는 증거가 없었다면 스스로를 의심했을 정도로.
일대일만 노리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고 알고 있는데, 난 아직 여러 번 보지 않아서 정보 없이 충분히 즐긴 뒤에 시도해도 늦지 않다 생각했고, 또 내 성격상 작위적인 걸 안 좋아해서 기대도 안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선물같은 경험이었다. 그리고 예쁜 언니랑 밀폐된 공간에서 바짝 붙어 있어서 너무 좋았고 으흐흐. 이래서 원온원에 한번 맛 들이면 개인 자산 상황이 끝장나는 건가,,? 맨덜리로 가고 싶다는 걸 보면 레베카의 이히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이 쪽 서사를 진득하게 본 적이 없어서 누구신지 모르겠다. 다음에 볼 때는 3층~4층 위주로 보는 걸로ㅇㅇ
병원으로 입장해서 펜던트 일대일까지는 기억이 또렷한데 이후부터는 특정 이야기만 따라다닌 게 아니라 정처없이 돌아다녀서 모르겠다. 두 번째 만찬에서 만찬장으로 내려갔다가 사람도 너무 많고 여기는 자첫 때 어설프게 찍먹이라도 했으니 올라가야겠다 싶어서 위층으로 올라왔는데 이후는 기억이 뒤죽박죽이다. 바에서 카드 치는 장면도 봤고, 당구대에서 치고박고 하는 장면, 또 호텔 로비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조금 봤다. 지배인 따라다니다가 지배인 방 구경도 하고 바로 직후에 옷은 남성복을 입으셨는데 화장은 화려하게 한 얼굴로 기갈 넘치게 노래 부르는 분도 만나고(드렉은 아니라서 뭐라고 칭해야할지 모르겠구만) 전부터 도무지 역할이 뭔지 모르겠는 남자 분이랑 맥더프 부인이랑 그릇이 엄청 많은 방에서(비싼 그릇이 많아서 조마조마한 마음을 다스리며 봤기에 기억남) 선을 넘지는 않지만 끈적하게 춤추는 거도 봤는데 단편적이라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네. 근데 오늘 공연 보고나니까 첫트와 비교해서 조급증은 사라진 걸 느꼈음. 다음에는 더 마음 편하게 볼 듯.
다시금 느꼈지만 정말이지 자본주의의 끝판왕 같은 공연이다. 개막 전부터 한 달에 한 번 씩 보기로 계획했는데 그런데도 정말 돈이 살살 녹는다. 특히 나는 대극장 가격에 익숙지 않아서 더욱. 그렇다고 돈이 아까울 정도의 저퀄은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지. 아주 만족하면서 보고 있다, 다음 한 달동안 이 힘으로 살 정도로. 이정도 기록을 남겨뒀으니 오늘 공연 봐도 ㄱㅊ겠지 후후 오늘 관극의 목표 1. 마지막에 입장해서 엘베 타고 들어가기 2. 3층~4층 위주로 보기 3. 가능하다면, 도무지 역할을 모르겠는 남자의 정체 알아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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